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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는 698년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나라로, 고구려의 후예로서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국가였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발해는 당나라, 일본, 신라 등 주변 국가들과 교류하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번영했다. 그러나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건국, 정치·문화, 대외 관계, 멸망 과정 등을 살펴보고, 발해가 우리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조명해본다.
1. 발해의 건국과 성장
1) 발해의 건국 배경
-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으며, 일부는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독립을 도모했다.
- 698년, 고구려 유민 출신의 대조영이 동모산(東牟山, 지금의 중국 지린성)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2) 발해의 국호와 정체성
- 초기 국호는 **진국(震國)**이었으며, 이후 당나라로부터 발해라는 국호를 하사받아 국호를 변경하였다.
- 스스로 고구려 계승국임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언어, 문화, 제도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3) 영토 확장과 성장
- 대조영과 그 후계자들은 빠르게 영토를 확장하며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 8세기 초반,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은 대외 원정을 통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요동 지방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은 내정을 안정시키고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개선하며 문화를 발전시켰다.
2. 발해의 정치·사회 구조
1) 중앙 정치 제도
- 발해는 **당나라의 중앙 관제(3성 6부제)**를 도입하면서도, 고구려의 전통을 유지하는 독자적인 제도를 운영하였다.
- **정당성(政堂省)**이라는 최고 행정 기관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 **6부(吏部,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두어 국가 행정을 담당하였다.
2) 지방 행정 체제
- 발해는 5경(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과 15부, 62주로 나누어 지방을 통치하였다.
- 이러한 행정 체제는 당나라와 유사했지만, 고구려의 지방 통치 방식도 계승하였다.
3) 신분 제도
- 귀족과 평민으로 이루어진 계급 사회였으며, 지배층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 차지했다.
- 피지배층에는 말갈족을 포함한 다양한 민족이 있었으나, 점차 발해 사회에 동화되었다.
3. 발해의 문화와 경제
1) 고구려 계승 문화
-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당나라와 주변 국가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 수도인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에는 궁궐과 불교 사찰이 들어섰으며, 그 구조는 고구려의 도성과 유사하였다.
-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벽화와 불상 등이 출토되었으며,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번성하였다.
2) 발달한 경제
-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지역을 포괄하는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 특히 목축업과 해상 무역이 활발했으며, 신라·당나라·일본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무역망을 형성하였다.
- 발해의 대표적 무역품으로는 모피, 인삼, 베, 도자기 등이 있었다.
4. 발해의 대외 관계
1) 당나라와의 관계
- 초기에 무왕은 당나라와 대립하며 요서 지역을 공격했으나, 이후 문왕 때부터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2) 신라와의 관계
- 발해와 신라는 한반도 북부를 놓고 경쟁 관계였다.
- 신라는 발해를 ‘북쪽 오랑캐’로 인식하며 견제했으나,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는 계속되었다.
3) 일본과의 관계
- 발해는 일본과 활발한 외교·무역 관계를 유지하였다.
- 신라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일본은 발해와 동맹 관계를 형성하고, 빈번한 사절단을 교환하였다.
5. 발해의 멸망과 역사적 의미
1) 거란의 침입과 멸망
- 10세기 초, 중국 북방에서 성장한 **거란(요나라)**이 발해를 공격하였다.
- 926년, 발해의 수도 상경이 거란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발해는 멸망하였다.
- 일부 유민들은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2) 발해의 역사적 의의
-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국가였다.
- 해상과 육상 무역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고려의 왕건은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고려가 발해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주장하였다.
6. 결론: 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오늘날 발해의 역사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지만, 발해가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건국되었고,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역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구려의 후예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발해는 단순한 고대 국가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 중 하나였으며,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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